혐오 없는 삶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교수 추천
최고의 르포에 주는 에곤 에르빈 키쉬 상 수상
단언컨대, 어떤 존재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양극단화로 인한 깊은 균열이 전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는 혐오와 편견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독일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주간지 《디 차이트》 편집장이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혐오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아 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혐오 없는 삶』이 판미동에서 출간되었다.
추천사를 쓴 김승섭 교수는 “어떤 존재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지적하며, 이 책을 통해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혐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접촉’을 제안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세분화할수록 필터 버블 사회 속에서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렇듯 ‘나와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줄어들수록 편견과 혐오가 점점 커진다. 반대로 나와 다른 사람과 더 많이 접촉하고 더 가까이 있을수록 편견은 줄어든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사례가 뉴스에나 나올 법한 특이한 일이 아닌, 일반화할 수 있는 명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 연립주택단지에서, 덴마크의 경찰서에서, 더블린 중심가에서, 보츠와나의 학교에서 난민을, 나치주의자를, 동성애 혐오자를, 우익 극단주의자를, 이슬람 급진주의자를 만나고 더불어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을 인터뷰한다. 이들이 관계 맺는 과정을 통해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 왕국을 떠나 인간의 개별성과 독자성에 대한 깊은 이해로 확장하고,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과 완전히 다른 사람과
언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가?
우리의 일상은 소수를 위한 시간만을 허락한다. 함께 사는 가족, 출퇴근 길에서 스쳐 가는 사람들, 식당에서 함께 밥 먹는 동료들, 저녁때 함께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몇몇 친구들. 이 소수의 사람들은 비슷한 직업, 비슷한 수입, 비슷한 취미를 갖고, 의심 속에서도 같은, 혹은 비슷한 정당에 투표한다. 이러한 필터 버블 사회에서는 많은 집단들 사이에, 빈자와 부자 사이에,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이민자와 정주민 사이에 거리와 침묵이 지배한다. 그리고 이 거리 사이의 편견을 무책임한 언론과 정치인이 더욱 부채질한다. 저자는 편견과 혐오를 배양하기에 이상적인 토양이 생성될 수밖에 없는 현 사회를 꼬집으며, 우리 일상의 쳇바퀴 안에 자리 잡지 않은 사람들, 즉 함께 밥을 먹지 않고, 우리보다 많이 벌거나 적게 벌며, 다른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도 우리 현실의 일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제안한다. 우리를 둘러싼 필터를 터뜨리면, 편견을 무너뜨리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어떻게 사회를 구할까?
우리는 난민을 내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가 실시한 난민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총 53%가 난민 수용에 반대하였다. 난민 수용 반대 이유는 경제적 부담, 범죄 등 사회문제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하랄트에게 역시 난민은 골칫거리였다. 그는 은퇴하여 연금 생활을 하는 자신의 평온한 노후를 난민들이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러나 아랫집에 들어온 젊은 부부와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작지만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의 편견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 책이 말하는 ‘접촉’이라 함은, 우연한 ‘만남’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이 ‘접촉’을 우연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정책에 의해 좀 더 다채로운 방향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만이 미국을 향해 총을 겨누려던 한 무슬림을, 나라를 포기하려던 한 동성애자를 구원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우파와 좌파, 빈자와 부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젊은 이민자 여성과 늙은 백인 남성 등이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오늘날 사방으로 흩어진 사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를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혐오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은 접촉의 역효과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개별 인간이 아닌 집단으로 만날 때, 개인이 아닌 오로지 ‘우리’와 ‘그들’이라는 부족들이 만날 때 역효과는 두드러진다. 저자는 부족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부족에서 빠져나와 작고 비정치적 상황에서 사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저자는 다른 정당에 투표하는 8,000명 이상이 모여 함께 대화하며 각자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독일이 말한다’ 프로젝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혐오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아 가는 전 세계 곳곳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한 가지에 대해 분명하게 시사한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이슬람 급진주의, 무정부주의를 내려놓게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알려 준다. 편견과 혐오를 허물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접촉해야 한다.
▶ 추천사
오늘날 우리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를 살고 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가치는 사실 여부가 아니라 우리 편에 유리한지에 따라 정해진다. 상대방이 누구인가는 그 사람의 나이, 성별, 국적, 인종, 장애, 성적지향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런 화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개별 인간의 고유한 역사와 그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구체적 세계에 대한 이해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의 뇌는 낯선 존재에 적대적이다. 동굴 속에서 생활하던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은 외부인을 경계하고 새로운 것들을 의심하며 생존의 길을 찾았다. 그러나 오늘날 혐오가 사회 곳곳에 퍼진 것은 그런 본능 때문이 아니다. 혐오를 지지층 결집의 도구로 활용하는 저열한 정치인들과 편견을 조장하는 기사 작성에 주저함이 없는 무책임한 언론인들을 제외하고는 이 혐오의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몇몇은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을 리 없는 기득권이고, 또 몇몇은 혐오는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컨대, 어떤 존재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모든 아시아인은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며 자신의 존재가 바이러스로 치환되는 세상을 경험했고,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은 그 혐오가 실제로 아시아인을 이 세상에서 지우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렇다면, 이 혐오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부족 정체성’을 벗어나 증오에 대항하는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선과 악, 우리 아니면 그들이라는 이분법 왕국’을 떠나 상대를 만나고, 인간의 개별성과 독자성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바스티안 베르브너는 그 절박한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사람을 만나 묻고 답하며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다. 고유하고 변화하는 존재인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김승섭(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저자)
▶ 본문 소개
프로방스의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국제주의자 임마누엘 마크롱(Emmanuel Macron)을 욕했다. 파리와 리옹에서는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우익 급진주의자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의 부상을 경고했다. 우파는 마크롱의 대통령 당선이 프랑스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듯이 행동했다. 좌파는 마린 르 펜과 함께 파시즘이 권력을 잡게 된다는 듯이 행동했다. 정치 경쟁자 사이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적대자들의 생존 결투 같았다. (-6p)
여름에 두 가족은 함께 엘베강가로 갔다. 날씨는 따뜻했다. 물속에 무릎을 담그고 있던 로시가 파도를 맞았고, 이 장면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로시는 매운 음식을 요리했는데,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하랄트도 이 요리를 먹었다. 아나스타시아의 입학식 때 크리스타는 생딸기를 듬뿍 넣은 딸기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 몇 주 만에 ‘집시들’은 ‘사람들’이 되었고, 로버트, 로시, 밀란, 아나스타시아, 크리스티나, 모니카가 되었다. 어느새 그들은 헤르메스 부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23p)
인종주의와 타인을 기꺼이 돕는 마음,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바니히는 크뤼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즈벤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나는 그와 교감할 수 있습니다.” (-p.35)
그러나 우리 일상의 쳇바퀴 안에 자리 잡지 않은 사람들도 현실의 일부이다. 구내식당에서 우리와 함께 밥을 먹지 않는 사람들,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벌거나 적게 버는 사람들, 다른 라디오 방송을 듣는 사람들, 유튜브에서 다른 알고리즘이 뜨는 사람들, 아마존으로부터 다른 책을 추천받는 사람들, 또는 다른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 모두 우리 도시에,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며, 같은 시민임에도 우리에게 낯선 이들로 머물러 있다. 가끔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 무시하면서 투표일 개표 방송 그래프에 나오는 다양한 막대 색깔을 보고 묻는다.
저런 인간들은 도대체 누구지? (-p.39~40)
편견에 기초한 갈등은 다르다. 아랍인들은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 남자들은 방탕하다, 혹은 유대인들은 믿을 수 없다, 같은 편견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편견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등 어떤 이념의 표출인지는 상관없다. 편견에 기초한 갈등은 언제나 거대한 것, 군중을 찾는다. 이런 편견은 초신성처럼 외부로 뻗어 나가려고 하고, 갈등과 관계없는 불특정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된다. (-p.77)
기자로서 이 부분을 인정하는 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오늘날 언론 보도는 자신들의 역할과 정반대의 기능을 하고 있다. 언론은 사회 안에서 편견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강화하고 있다.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잘못된 히스테리를 만들어 낸다. (-p.116)
공감은 우리가 이전에 멀리서 붙여 두었던 라벨을 상대의 육체에서 떼 내 버린다. 적, 롬족, 난민, 외노자놈, 이 모든 것이 단 하나, 사람만 남을 때까지 그 의미를 잃는다. (-p.147)
동성애는 핀바르에게 오로지 섹스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성애에서도 섹스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사랑, 가족, 일상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p.186)
어디에 사세요? 대도시에서 이 질문은 속성 정체성 진단법이다. 그가 좌파인지 우파인지, 젊은 사람인지 늙은 사람인지, 가난한지 혹은 부자인지를 속성으로 진단할 수 있다. 도시 구역의 이름은 기호가 되었고, 지리는 사회 환경과 정치관, 생활 세계에 녹아들었다. (-p.222)
가장 많은 사람을 납득시키는 사람, 가장 좋은 이야기를 설명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사회와 정부는 설명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확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p.291~292)
서문.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1장. 타자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어떻게 사회를 구할까?
2장. 지옥
접촉의 힘은 언제 효력을 상실하는가?
3장. 경쟁
미디어는 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까?
4장. 귀환자들
웃음이 무기가 되는 방법
5장. 제비뽑기
우연과 민주주의
6장. 이웃
사는 곳은 우리를 어떻게 규정할까?
7장. 공동체
접촉과 전쟁
8장. 편지
접촉과 평화
후기.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