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천에서 만납시다
백봉 김기추 거사 법어집
백봉거사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이 시대 최고의 법문집
출가하지 않은 재야 불교인으로서 선지식(善知識)의 반열에 올라 한국 불교계에 거사풍(居士風) 불교 지도자로 명성을 남긴 백봉 김기추 거사의 대표적인 법어집 『도솔천에서 만납시다』가 판미동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1996년 출간된 초판에 일부 원고를 추가해 개정증보판으로 펴냈다. 1장은 백봉거사가 쉰이 넘은 나이에 불교계에 입문한 후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생애를 소개하며, 2, 3, 4장은 백봉 거사의 저서인 『절대성과 상대성』, 『유마경대강론』, 『금강경강송』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한 법문과 철야 정진 법회나 수시 법회 때 전한 설법 중 주요한 것을 추려 실었다. 내가 있어야 우주도 있고 부처도 있다는 ‘허공으로서의 나’, ‘참다운 주체성’을 요체로 삼는 백봉거사의 설법은 활달한 표현과 자신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백봉거사는 속가에 머문 채 살아가면서 성불(成佛)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친숙한 일상 언어로 전달한다.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 제자들을 지도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 평생을 바쳐온 백봉거사의 열정이 담긴 설법은 일체의 허망함을 꼬집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집착과 망상을 돌아보게 만든다.
백봉白峯 김기추金基秋 약력
1908년 음력 2월 2일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대범하고도 반항적인 기질을 지닌 그는 항일 민족운동을 벌이다 부산형무소에서 일 년을 복역하는 등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광복 후 교육 사업을 하다가 오십이 넘은 늦은 나이에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해 ‘무(無)자 화두’로 정진하던 중 1964년 1월에 활연대오(豁然大悟)했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한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백봉거사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읊은 시구
백봉거사는 큰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속가(俗家)에 머물면서 거사풍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여러 철학 교수와 예술가들이 그를 찾았으며 청담, 전강, 구산, 경봉, 탄허, 혜두, 강혜 스님 등과 교분을 나누었다. 자비심 넘치고 열정적인 그의 설법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하고 망상을 놓게 해 그들이 참다운 자유와 평화에 이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85년 8월 2일 아침,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입적했다. 중생에 대한 지극한 연민으로 열반에 든 뒤에도 거사의 눈에서 눈물이 비쳤다고 한다. 저서로는 『금강경강송』, 『유마경대강론』, 『선문염송요론』, 『절대성과 상대성』 등이 있다.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는 놈이 누구냐.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는 놈이 누구냐.빛깔도 소리도 없는 바로 그 자리, 허공이 본바탕이고 법신이다.”
경계를 넘어 선지식으로 추앙받다
백봉거사는 그가 몸담았던 재야 불교뿐만 아니라 주류 불교계에서까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욕설법문으로 유명한 춘성스님은 출가자가 아닌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거사에 빗대 백봉을 ‘한국의 유마거사’라고 불렀으며, 탄허스님 역시 ‘말법시대(올바른 법이 무너지고 속임수와 사이비들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등불’이라고 백봉거사를 향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초까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스님은 백봉거사에게 삭발출가를 권하며 조계종 본산 조실을 맡아 달라는 권유를 하기도 하였으나 백봉은 절대성 자리를 깨치는 불교라는 종교가 기복과 상대성 시비 놀음에 빠져 있다고 일축하며 단칼에 제안을 거절했다. 백봉을 달마와 육조대사의 후신이라고 믿은 묵산선사는 보림선원을 세우고 백봉거사의 거사풍 신념을 이어나가고 있다. 백봉거사는 『금강경강송』, 『유마경대강론』, 『절대성과 상대성』, 『선문염송요론』 등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약 300여 개의 그의 설법 녹음 테이프는 여전히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그의 생생한 설법을 전해 주고 있다. 『도솔천에서 만납시다』는 그 테이프에서 추출한 백봉거사의 거침없는 화법을 그대로 전달한다.
『도솔천에서 만납시다』에 실린 글은 이십여 년간 이루어진 백봉거사의 법문 중에서 일부를 가려 뽑은 것이다. 법문의 특징은 백봉거사가 종지(宗旨)를 세운 소위 거사풍(居士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먼저 설법을 통하여 일체만법인 상대성이 본래 우뚝스리 홀로 존귀한 절대성의 굴림새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고, 그 다음에 반드시 무상(無相)의 법신(法身)이 유상(有相)의 색신(色身)을 굴린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파악하고 나서 화두를 지니게 하는 것’이 거사풍의 요체다. 따라서 백봉거사가 쓰는 방편도 대체로 학인(學人)들이 올바른 견처(見處)를 밝힐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니, 독자들도 이 점을 유의해 열린 가슴으로 간절히 귀 기울인다면 백봉거사가 전하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머리말 중에서
‘허공으로서의 나’를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
“바로‘나’가 있기 때문에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는 겁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진짜‘나’가 모든 걸 나툰 겁니다.”
백봉거사가 전하는 가르침은 일상을 살아가는 재가 수행자를 위한 ‘새말귀(新話頭, 새로운 이 시대에 맞는 화두)’이다. 새말귀의 핵심은 전통적인 화두를 지니고 끊임없이 수행하는 출가 수행자와는 달리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삶에서 자신을 철저히 이해하며 수행을 이어 나가는 방법을 강조한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허공으로서의 나’가 실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을 하든 허공법신 속에 머물며 극락도 지옥도 그 안에서 만들어지고 고통과 기쁨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집착하게 된다는 백봉거사의 이념은 화두를 품기 이전에 ‘무엇이 나인가?’부터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의 혼탁함이 줄어들고 개인으로서도 자신의 인생과 세상만물이 바로 보인다는 것이다.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와도 오는 것이 아니니, 여러분은 지금 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이 가고 오는 것 봤습니까? 뭐가 있어야 가고 오는 것이 있죠. 그러나 이 모습인 몸뚱이는 가고 오고 그래요. 하지만 이것은 가짜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실다운 곳에 앉아서 이 가짜인 모습을 쓸지언정 이것을 ‘나’라고 해선 안 됩니다. 이 몸뚱이는 느낌이 없으니 주체성이 없는 것 아닙니까? 진짜 ‘나’는 주체성이거든요. 이 주체성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자체성이 없는 가죽부대인 이 몸뚱이를 만들어 내요. 천인(天人)도 만들 수 있고 부처 몸도 만들 수 있으며, 마음먹는 데 따라서 축생의 몸도 만들어 탈을 뒤집어쓰기도 합니다. —본문 중에서
▶ 추천평
● 일찍이 수많은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수행을 해 왔지만 백봉거사처럼 분별이 뚝 떨어진 무심도인(無心道人)은 보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언제나 투명했던 그분, 어떤 물음에도 손뼉을 치고 깔깔 웃으시던 천진한 그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강혜스님
● 나는 백봉도인을 만났고, 이 만남은 내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 놓았다. 밭에서 김을 매다 막걸리를 한 잔씩 돌리며 “야, 막걸리 잔 속에 우주가 있구나!” 하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